0.0007% 대 100%…숫자로 따져봤다, 장관 문책해야 하는 이유
그 남쪽의 오키나와섬에는 그 사이에 삼산(三山)시대를 거쳐 류구국이 세워졌다.
해적 활동을 통해서였다.학술과 문화의 본산으로서 많은 학자-관료를 배출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.
‘양(洋)은 동양·서양 등 용례에서 ‘바다가 아니라 광대한 지역과 해역을 포괄하는 의미다.황금알 사라지자 잡아먹힌 거위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‘황청직공도(皇清職貢圖·1769년경)에 등장하는 류구인.[사진 위키피디아] 8세기 말부터 일본 기록에서 사라졌던 남쪽 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997년.
[사진 위키피디아] 타이완 원주민의 언어가 남양어족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확인되어 있다.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타이완과 류구 중 대륙에서 가깝고 덩치도 큰 타이완보다 류구가 역사의 무대에 먼저 등장하고 더 화려한 배역을 맡은 사실이 일견 뜻밖이다.
로저 블렌치가 『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지도』(2009)에서 추정하는 이 어족의 최대 확장기 분포 지역에는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안지대가 많이 들어 있었다.
1392년에 명 홍무제가 푸젠성 주민 36가구를 보내주었다는 전설이 있는데.)집개 모양의 두 개 돛살로 만든 게집개돛(crab claw sail)은 소형 범선의 평형을 지켜주는 아웃리거(outrigger)와 함께 범선 디자인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다.
이 시기에 타이완의 존재도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타이완의 배경에는 망망대해뿐이었다.일반인은 구메무라 주민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.
북쪽 절반은 사쓰난(薩南·사쓰마의 남쪽이란 뜻) 제도라 하여 가고시마현에 속한다.타이완을 ‘소(小)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.